불소치약은 죄가 없어요

살면서 갑자기 옛날에 본 영화나 드라마가 생각날 때가 있잖아.
당시에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뭔가 관련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아... 이거 뭐더라... 하고 생각하게 되는.


 CSI S9E13 Deep Fried and Minty Fresh



요 며칠 불소에 마음을 뺏긴 채 지내면서 생각난 건 CSI의 Deep fried and minty fresh라는 에피소드. 남편이 너무너무 미웠던 부인은, 자살하면서 자신의 죽음이 남편의 짓인 것처럼 꾸민다.
여기서 그녀는 목을 매거나 총구를 머리에 겨누는 클래식한 방법 대신 치약 두 통과, 진정/구토억제 작용이 있는 항히스타민을 먹는 신박한 방법으로 자살을 해(그녀 = 전직 치위생사).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대부분의 치약은 불소치약이거든. 뭐야 그럼. 사람이 먹고 죽을 수도 있는 걸 슈퍼에서 막 팔고 있는 거네?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거면, 이제 막 인간 같아진 작은 사람들(=아가들)은 뭘로 이를 닦으라는 거야?

 www.google.com 여기 경고문 있네. 이 닦는 양 이상으로 삼키면 독극물 관리 센터에 즉시 연락하라는데???


 우리나라 치약에도 잘 보면 비슷한 주의사항이 있다.




유/소아의 불소/무불소 치약 사용에 대한 문제는 치과의사, 소아과의사마다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던데, 난 이게 불소치약을 사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한 인간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 포스트는 임신을 계획 중인 그중 한 인간이 그러한 고뇌를 떨쳐내고자 자신의 직업적 특성을 살려 조사한 결과물이지.
오늘 내가 할 얘기가 좀 많아요. 지루할지도 몰라.
불소치약을 사용하는 게 아가한테 엄청난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게 독성의 기준은 항상 양(dose) 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야. 긍까 같은 성분이라도 위험할 정도로 많이 섭취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지(찝찝한 마음까지야 어쩔 수 없겠지만).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물에 대해서도 물중독이라는 말이 있잖아.
사실 충치 예방을 위해 (치약 등 어떤 형태로든) 아이 치아에 불소를 적용하는 방법은 치과대학의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야. 그만큼 불소의 충치예방 효과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이에게 치과 치료를 받게 하기 전에 자신이 사는 동네 상수도에 불소를 투입하는지의 여부를 치과의사에게 이야기하라고 권장해.
이게 또 무슨 얘기냐. 충치 생기지 말라고 불소 바르러 치과에 갔는데 상수도 얘기는 왜 해야 해?

www.nl.go.kr 2004년 자료니까 조금 오래된 자료예요.

www.prism.go.kr 인하대학교에서 2014년, 보건복지부에 '수돗물 불소농도조정사업 안정성 평가'연구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한 자료의 요약 및 결론이야. 난 (필요시 제한적으로) 수불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자료만 보여주는 거고.



이걸 우리나라에서는 '수돗물 불소농도 조정사업'이라고 하는데, 충치를 예방하려고 상수도에 불소를 첨가해서 수돗물의 불소농도를 적당한 수준으로 맞춰준다는 거지. 말했듯이 독성의 기준은 양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치과에서 아이한테 필요 이상의 불소를 적용하지 않기 위해서 그 동네 상수도에 불소가 투입되는지를 알려주면 도움이 된다는 거고.

수돗물 불소화 사업 역시 아주아주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매우 복잡한 문제니까 넘어가고 싶습니다만... 다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동네들처럼) 불소농도를 조정하는 지역이 아니니까 수돗물에 불소를 추가로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불소치약에 대해서 생각해봤어.

(참고로 물 속의 불소는 끓여도 사라지지 않고 수돗물 속 염소처럼 그냥 둔다고 날아가지도 않는대. 몸에 유용한 모든 미네랄을 다 없애버리는 역삼투정수기로는 불소를 필터링할 수 있다던데. 이게 수불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반대 이유 중 하나)

다시 치약 이야기로 돌아가서,
CSI가 알려준 일반적인 불소치약 내의 불소량을 정리해볼게요.

"치약은 튜브 한 개당 평균 170g쯤 하는데 이 중 0.25%가 불소라서 치약 한 튜브에는 425mg의 불소가 들어있어(1,000~1,500ppm 기준).
불소 섭취 시 치사량은 체중 1kg당 5mg.
치약으로 자살한 그녀의 체중이 50kg 정도니까 이 사람의 불소 치사량은 250mg이 되는데, 치약을 통째로 두 개나 먹었으니까 총 850mg의 불소를 먹은 거고 그래서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됐다는 슬픈 이야기"



(놀라지 마세요. 제가 아니라 CSI가 계산한 거예요 ㅋㅋㅋ)
내가 사용하는 치약은 불소농도가 1,000ppm이고 160g이야. CSI가 계산한 치약과 크게 다르지 않군요. 뭐, 마트에서 행사할 때 산 특별할 것 없는 치약이니까 당신이 쓰는 치약과도 비슷한 제품일 거예요.

좀 오래된 자료지만, 1988년 미국 소아치과협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이들은 보통 칫솔질 한 번당 0.12~0.38mg의 불소를 먹는대(www.aapd.org Fluoride in toothpastes for children: suggestion for change). 뱉어내지 못하는 36개월 이하의 아가들은 이것보다는 좀 더 먹을 거고. 우리 D는 12kg이니까 단이의 불소 치사량은 60mg이고, 하루 두 번 칫솔질을 한다고 했으니까 하루에 0.24~0.76mg 이상의 불소를 먹는다고 생각하면, 일반적인 치약으로 이를 닦아준다면 100일도 안돼서 불소 치사량 이상을 먹게 되겠네.

그럼, 이거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만약 D가 냠냠 먹은 불소가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고대로 몸 안에 쌓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또 식품이나 차, 사우나, 운동, 요오드 등으로 불소를 배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왜, 그런 거 있잖아. 몸속 독소 배출법). 또다시 메디컬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불소는 섭취된 전량이 몸속에 축적되는 것은 아니고, 치사량에 달하는 불소를 한꺼번에 먹지 않는 이상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는 거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네.
그래도 이 얘기만 마저 하자 ㅋㅋㅋㅋㅋ

2014년 영국(www.sps.nhs.uk)에서 성인이 불소치약을 삼켰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 발표한 자료가 있었어(요즘 뭐, 성인에서도 무불소 치약을 써야 한다는 매우 극단적인 사람도 있으니까 한 번 들어봐). 불소치약을 삼켜서 불소중독을 일으킨 사례는 총 3 가지가 보고되었는데, 이 세 사람 모두 하루에 최소 6번에서 18번까지 이를 닦고, 그중에 한 명은 치약 맛이 좋아서 이틀에 한개씩 치약 하나를 통째로 먹었대(하루 68.5mg의 불소를 먹은 셈이라더라). 치약은 또 왜 삼킨다는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과거 효과를 높이느라고 칫솔질 후 물로 헹구지 말고 치약만 뱉어내라고 한 적이 있었다더군요.


www.google.com 저걸 뱉어내기만 하고 물로 헹구지는 않았다는 얘기야.



어쨌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치약이나 칫솔질에 집착하는 광인(+치약을 의도적으로 삼켜야 함)이 아닌 이상 불소 중독은 잘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치약에 의해서 불소중독 증세를 보인 이 세 사람 모두 치료 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호전되었고(몸 안의 불소가 배출된다는 거지).

후 이제 드디어 내 자식한테 불소치약을 쓰게 할 건지에 대하여 내가 내린 결론.

* 정리
1. 불소는 그 농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음식에도 있고 자연 상태의 강물이나 바닷물에도 있는 물질로 적정량일 때 충치를 예방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요.
2. 치사량을 기억하세요. 불소 용액으로 가글하고, 썩지 말라고 불소도 발라주고, 불소 첨가된 물을 마시고, 고농도 불소치약을 사용하면 당연히 불소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겠죠.
3. 전 아이한테 불소치약 사용할 거예요. 9개월쯤 되어서 유치 앞니가 대여섯 개 정도 나면 저불소 치약으로 시작해도 좋겠네요. 너무 어릴 때 치약을 쓰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불소 때문이 아니라 계면활성제 같은 치약 내 다른 성분들이 싫어서 그래요.
4. 마지막으로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는 36개월 이하 유아에서 치아가 나온 즉시 불소치약으로 이를 닦아주라고 권장하는데, 이때 아침, 저녁으로 쌀알만 한 크기만큼만 치약을 짜서 사용하라고 합니당. 좀 더 커서 3~6세가 되면 완두콩만큼만.

 www.ada.org 미국치과의사협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기 안전에 대한 문제는 누가 대신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언제나 결론은 '엄마에게 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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